213미터 상공(3)
주인집 할머니의 횡사로 졸지로 빈집 지킴이가 된 내게, 한 여자가 대기해 있기라도 하 듯 곧바로 사건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다락방 동네 계단은 언제나 아득합니다. 올라갈 때나 내려갈 때나 변함없이 무릎관절을 힘들게 하는 계단 중간쯤은 쉼터 구실을 한 덕분에 윤이 나게 반질반질합니다. 그날도 반 게걸음으로 내려가며 쉼터 계단을 채간 여자와 맞닥뜨렸습니다. 벌써 세 번째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몇 번 만나면서 다락방 동네의 구성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출중한 세련미는 없지만 물론, 아랫동네 평가기준입니다.
그러나 다락방 동네의 구성원이 된다는 전제하에 뜯어보면 신비하고 탁월하고 예쁨이 꽉 찬 이목구비를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체취며 피부 톤이 좋은 얼굴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면서 가벼운 목례까지 던져주었습니다. 쉼터를 빼앗긴 짜증을 꿀꺽 삼키며 남자답게 무료급식소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어쩌면 뒷모습에서 엉덩이와 종아리 잔 근육을 읽어달라는 바람은 있었지요.
그렇게 얼굴을 익히니까 다락방 동네 안에서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용기이랄 것도 없이 괜히 퉁명스러운 말투로 먼저 다가갔습니다. 여자의 다소곳한 목례는 여전했습니다. 나들이 나온 것처럼 뒷짐을 지고 있던 여자가 반짝 돌아섰습니다.
“뭐라고 하셨어요? 딴 생각 하다가 못 들었어요.”
“여기에 언제 이사 왔는 냐구요?”
“두 달? 두 달하고 보름 되었어요. 통장님이세요?”
“그건 아니지만, 어디 살고 있어요?”
“깜장 대문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없지만 순전히 즉흥적인 발상에서 여자의 의중을 떠보고 있는 씩씩함에 스스로 감탄을 했습니다.
“세집 건너 파랑대문 보이죠?
여자가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경청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파랑 대문 집을 알고 있었던 가 봅니다.
“접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죠?”
“알고 계셨네요. 그래서 말인데 빈방이 하나 생겼어요. 뭐 방세는 필요 없고 옮길 생각은 없나요?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을 만큼 고독해서 그럽니다.”
“길 잃은 어린 양을 살려 준다 셈치고 그렇게 해볼까요?”
더플백 여행용 가방을 달랑 어깨에 메고 그날 밤 여자는 즉시 몸을 옮겨왔습니다. 사생활보안과 방세 없는 쾌적한 분위기에 혹하여 늑대소굴에 찾아왔다는 여자는 ‘장미’였습니다.
“이름이 좀 헤프다고 생각되죠? 면사무소 출생신고를 하러 갔다가 화단에 핀 장미를 보고 순간변심으로 장미가 되었데요. 처음엔 장은지라 뭐랬나.”
장미면 어떻고 민들레면 어떻습니까. 척박한 이곳에 비로소 탄생하는 사람냄새를 축하하기 위해 생 라면을 부서뜨려 스프를 함께 뿌려먹었습니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의 굴레에서 한발을 빼기위해 오늘부터, 장미가 움직이는 방향에서 비켜주었습니다. 마음껏 자유롭게 헤엄치라는 배려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가스렌지를 들여놓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