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미터 상공(8)
장마철로 접어든 다락방동네는 자우룩이 빗소리로 가득합니다. 물안개가 곳곳에 스며들고 어느 처마 밑에는 타격으로 작은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내 사라집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동네사람들은 굳이 빗속을 뚫고 힘들게 외출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고요를 가져옵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제자리는 항상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그래서 아랫동네에서는 딱하게 보여도, 그대로 살아지는 가 봅니다.
지금 장마로 인한 침수는 동네 어디에도 불가능합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반드시 흐르기에 쭉쭉 살판난 듯 아랫동네를 향하고 있습니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한때 신경 쓰였지만 이젠 정겹습니다. 부탄가스버너에 냄비를 올립니다. 방문을 열어두고 장미는 빗줄기를 세듯 정물처럼 박혀있습니다. 이 작은 공간을 채우는 구성요소가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식은 밥을 의식하며 라면 한 개만 뜯어 스프를 분리합니다. 물이 끓습니다. 라면을 네 등분으로 분질러 냄비에 투하합니다.
미처 사놓지 못해 한 개뿐인 계란도 터뜨려 젓가락으로 풀어놓습니다.
이빨로 개봉한 스프를 넣자 비로소 집안에 생기를 불어놓고 있습니다. 단지 스프 하나 풀어놓았는데 강력한 냄새는 빗줄기에 의해 밖으로 달아나지 않고 집안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먹는데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장미가 바짝 버너 앞으로 몸을 밀착시킵니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침수된 집과 차들로 아연실색하는 아랫동네 사람들의 표정이 뉴스를 타고 있습니다. 곧 잠길 것 같은 다리 건너편에서 기자의 공허한 외침이 먹먹하게 메아리칩니다.
‘한강 수위에 영향을 주는 팔당댐이 초당 8천8백t 가량의 물을 방류하고 있고, 충주댐도 초당 약 5천8백t을 내보내고 있어서 집어삼킬 듯 한강 물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장미에게 나무젓가락과 종이컵을 건넸습니다. 언제 적 단무지인지 모르지만 장미 앞으로 밀어주었습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장미의 젓가락질이 시작되었습니다. TV를 껐고, 종이컵에 담긴 라면 열기를 식혀 먹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약간 쌉싸름한 단무지에도 젓가락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식은 밥까지 말끔하게 비운 뒤 남은 국물에 믹스 커피를 태워 공평하게 나눠 마셨습니다.
스프맛과 커피 맛이 어우러져 현실에 처한 상황을 곱씹게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오빠 할 말이 있어요.”
빗소리 탓인지 장미의 목소리는 울림이 컸습니다. 열어놓은 방문 한쪽 벽에 기대있던 내가 시선을 그대로 둔 채 관심을 보였습니다.
“들을게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장미를 봤습니다. 반대쪽 벽에 기대있는 장미는 동요도 없이 다음 말을 덤덤하게 이어나갔습니다.
“어릴 적 정신질환자에 우울증환자로 살게 해준 한 인간이 있어요. 수시로 성폭력과 폭행을 일삼으며 숨도 못 쉬게 만들었던 악마에게 심판하는 날만 손꼽으며 살아왔어요. 어쩌면 반드시 살아남아야하는 이유도 되었겠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