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미터 상공(9) 곧은 빗줄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실타래처럼 끊이지 않고 바닥을 치는 빗줄기에, 넋을 잃다보면 굳은살이 되기 전 상처가 자연히 소환되나 봅니다. 웅덩이 속이 주는 압박감이 깔딱깔딱 힘겨운 호흡으로 대신하고 밀봉했던 비밀을 털어놓게 됩니다. 장미가 자세를 고쳐 잡습니다. 나는 바른 자세로 경건하게 귀를 열어놓습니다.  “초등학교 오학년 여름, 대청마루에서 잠 든 나를 그 인간이 깨웠는지 빗줄기가 깨웠는지 알 수 없게 눈을 떴지요. 몇 달에 한 번씩 다녀가는 그 인간이 술 냄새를 풍기며 방구석으로 나를 밀어 넣었어요. 엄마가 식당에 일하러 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유와 완력으로 나를 덮쳤어요. 입안에 수건을 쑤셔 넣는 바람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했어요. 조금이라도 발설하게 되면 엄마의 팔다리를 부러뜨려 놓거나 아예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어요.” 왜 내가 이다지도 손끝이 저려지는지, 가만히 듣고 있는 내가 이다지도 울분이 솟구치는지, 빗소리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엄마의 생명을 살려주고 있다는 생각에 그 인간의 요구를 다 들어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묵살 할 순 없었어요. 중 삼 땐가 나와야 할 생리 날짜를 건너뛰어 편의점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샀어요.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초조했고 두 줄이 선명하게 그려진 테스트기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어요. 이 인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자는 결심은 그때 하게 되었어요. 뱃속에 아기는 산부인과에 데려가 노발대발하는 그 인간의 간악한 연기력 덕분에 떼긴 했어요. 그 후로 근방에 오진 않았지만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군요. 접때 길고양이들에게 따끔하게 혼내주는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죠? 그 인간을 내가 죽여도 될까요?” “엄마가 퇴근길에 음주운전 차량에 목숨을 잃었어요. 목숨 값마저 챙겨갔는데, 다시는 보지 않겠구나 생각한 그 인간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굽은 허리에 폐지를 줍고 있었어요. 어쨌든 나를 유린하고 엄마의 목숨 값마저 더해져 한층 살의를 느끼는데 충분했어요. 집도 알아뒀어요.” 비가 잦아지고 있었습니다. 아랫동네로 물살 좋게 흘러내리던 다락방동네의 물줄기도 눈에 띄게 약해져 갑니다. 어쩌면 기세등등하게 묵은 때를 아랫동네로 흘려보내는 유일한 수단이 우기를 틈타 방출한 수로의 물줄기가 아닐까요. 언제 다락방 동네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아랫동네 사람들의 의식을 장마철에 잠깐 두드려봅니다. 다락방 동네도 같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그렇게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죽이고 싶다는 꿈도 매한가지입니다. 역시 아랫동네 사람들 중에도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은 있겠지요. 꼭 있어야 됩니다. 차별 없는 한통속이 되기 위한 묶음이기 때문입니다. “앞장서세요. 집이 어디인가 알아둬야 살인에 필요한 도구에 따라 날씨와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니까요.” 장미가 먼저 일어났지만 주춤거렸습니다.  “괜한 이야기에 오빠를 끌어들여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후회는 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동참해주는 아군이 있다는 것이, 글러먹은 이번 생이 아니라서 좋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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