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미터 상공(11)
다락방 동네로 가기위해 걸음을 옮깁니다. 뺑소니차가 들이받은 그 인간에 대한 이야깃거리로 마음이 급해져 빨라진 걸음에 힘을 실어줍니다.
세상 무게를 안고 살았던 이제껏 걸음이 무색해질 정도로 마치 모터를 단것처럼 쌩쌩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 비교된 걸음은 평균적 속도였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살아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나만 모른 체 얼마나 주위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살아왔는지 퍼뜩 느껴집니다.
지름길 골목을 택하지 않고 계단을 단숨에 올라 세집 건너 파랑대문으로 뛰어듭니다. 장미를 처음 만나 알기 쉽게 은유적인 표현이 필요했던 ‘세집 건너 파랑대문’이 이제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집안은 넓지 않지만 구석구석 장미를 찾았습니다. 웬만하면 눈에 띄는 곳에 널브러져 있던 장미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문지방에 걸려 중심을 잃다가 TV가 눈에 띄었습니다. TV뒤에는 칠백이십 사만원이 들은 서류봉투가 있습니다. 장미의 부재중과 연관 짓고 싶지 않지만, 의심이 가는 마음은 속물근성에 기인했다고 봅니다.
서류봉투는 없었습니다. 있어야 될 장미와 돈이 동시에 없어졌습니다. 원체 소유에 집착하지 않았지만, 믿음에 대한 배신감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 모서리 구석에 처박히듯 내동댕이치게 됩니다. 훨씬 이전에 느껴야 될 아픔도 없습니다. 무딘 이빨을 갈며 살의를 느낍니다. 어쩌면 그 인간의 옆구리를 들이받던 차주도, 전 애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장미의 눈 안에 들기 위해 실행에 옮길 뻔한 애인과 실행에 옮긴 전 애인의 차이정도로 설명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인간이 어릴 적 장미를 겁탈한 친부였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대단히 혼란스럽습니다. 오랜만에 넝쿨식물처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이러다 과부하가 걸리면 헐크처럼 변할지 모릅니다. 어찌되었던 아랫동네 바람이라도 쐬며 자신을 추슬러야겠습니다. 이번에는 계단 중간에서 쉬지 않고 단박에 내려갔습니다. 햇살이 곱습니다. 장마가 걷힌 가을햇살이 멀리까지 뻗어있습니다.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알싸한 비린내가 다투어 들어옵니다.
길고양이들이 어느 가게에서 횡재한 생선냄새려니, 골목 끝을 향합니다. 웅성웅성 길고양이들이 덩치 큰 물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장미가 없어 약간 주눅이 들었지만 마음을 다잡으며 한발 한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봤습니다. 남은 골목의 끝보다 세배정도 더 많이 온 것 같아 그대로 전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처음 들어선 골목입구는 푸른빛이 초롱초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허리춤을 올리며 길고양이들이 에워싸고 있는 물체를, 손바닥으로 어둠을 걷어내고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장미가 옷이 벗겨져 의식을 잃은 체 그곳에 누워있었습니다. 한 마리, 우두머리 길고양이도 생사를 알 수 없게 뻗어있었습니다. ‘헉’ 나는 목젖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내내 서있어야만 했습니다. 빈 서류봉투가 발기발기 찢어져 길고양이들의 발길에 채였습니다. 곧 가만히 서있지 못한 내 몸은 오열했고 쓰려져있는 장미의 귀에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의식이 돌아오면 세집 건너 파랑대문으로 와요. 용서해줄게요.”
장미와 길고양이를 두고 골목 끝을 벗어날 때까지 많은 시간을 소모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름길이라 생각했던 골목으로 접어들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