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기 자는 사옥이고 본관은 월성이다.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신체가 크고 빼어났고 담력과 지략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세기는 어린 소년의 나이에 날마다 범을 잡고 토끼를 잡는 것으로 일삼았다. 농사를 짓는 등 생계를 위한 건설적인 일은 아예 하지 않았다. 서기 1896년 병신(丙申) 창의(倡義)에 청송의 의병으로 나아갔고, 뒤에 남석우 부대의 포초장(炮哨長)이 되어 토적(土賊)1)들을 많이 죽였다. 정용기가 산남의진을 이르키자 이한구의 영장(營將)으로 참여하였는데 적을 만나면 한 번도 꺾이지 않은 이세기를 본 이한구는 그를 장하게 여기면서 “사옥같은 사람 100명이 있으면 아무런 근심이 없겠다”고 하였다. 서기 1907년 정미 봄에 산남의진의 선도(先導)가 되어 남석인과 함께 청송에서 의병들을 모집하였는데, 이 사실이 발견되어 적에게 사로잡혔지만 중도에서 탈출하여 의진 본대로 되돌아왔다. 급기야 입암에서 소부대를 이끌고 밤의 어둠을 타고 적을 기습하여 완전한 공적을 취하려했으나 도리어 적에게 패하고 결국 정용기, 이한구 등 여러 의병들이 모두 순몰(殉沒)하기에 이르렀다. 세기는 스스로 그 기회를 놓친 죄는 만 번 죽어야 한다고 한탄하면서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하여 동엄공에게 돌아갔다. 급기야 동엄공이 손수 의병진을 이끌자 중군장이 되어 적을 잡고 군기를 획득함이 많았지만 동엄공이 또 해를 입자 세기는 의병으로 적진을 습격하여 대장을 탈출시켜 오고자하였다. 적의 뒤를 쫒아 하양의 주요길목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여 팔공산을 돌아다니기도 하였지만 끝내 자신의 생각과는 같지 않아 뒤에 작은 부대로 장기(長鬐)2)를 함락하여 수십 명의 적을 죽였다. 그 후 정순기와 더불어 최세한을 수령(首領)으로 추대하고 설날을 맞아 정환직, 정용기 부자와 순절한 여러 의사들의 영전에 제수를 차려 올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죽기를 맹세하였다. 최세한이 또 패하고 결국 세기 혼자 버티지 못하고 적에게 사로잡혔지만 말과 얼굴빛(辭氣)은 늠름하여 적을 꾸짖고 굽히지 않았다. 적의 우두머리가  “너는 폭동의 무리로 사람들을 침범하고 재물을 빼앗았으니 도적놈이 아니냐?”라고 하자 이세기는 격한 목소리로 “너희는 일종의 섬 오랑캐로서 바다만 믿고 스스로 강하다 여겨 우리의 정권을 움켜쥐고 우리의 강토(疆土)를 빼앗았으니, 예와 지금에 없는 큰 도적놈이다. 나는 당당하게 나라가 인정한 선비로 뜻은 나라의 땅을 잃지 않고자 하여 이미 이리저리 다니면서 음식 대접을 받은 도움도 없었지만 설혹 그렇다 해도 백성은 대한의 백성이요 밥도 나의 밥인데 감히 나더러 도적놈이라 말하느냐?”라 대꾸하였다. 대구감옥에 이르렀더니 감옥을 책임지는 관리가 감옥 생활을 하는 복무 조항과 형벌을[條服定刑] 정하고자 하기에 세기는 즉시 격한 목소리로 “이세기는 왜놈들을 죽이고자 하고 왜놈들은 세기를 죽이고자 함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그러니 너희들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으냐?”하고 걸터앉아 있던 탁자를 끌어당겨 던져 뒤집어 버리고 드디어 적의 손에 죽었다. 그의 손아래 누이는 수백 리 밖에 살고 있었는데 세기가 사로잡힌 이후부터 날마다 일삼아 감옥을 내왕하면서 여러 가지 상황을 탐문하더니 바야흐로 세기가 죽는 마당에 나아가 시신을 수습하여 관을 이송하여 영천 자양 충효마을로 돌아와 우선 보현동의 뒷산 자락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원문〉 李世紀는 字士玉이요 月城人이라 性이 豪俠魁岸하고 膽略絶人하야 年甫成童에 日事射虎搏兎하고 不事産業하다 丙申之倡에 爲靑松編軍하고 後爲南錫佑郡哨長하야 多殺土賊하고 及鄭公山南之擧義에 爲李韓久營將하야 每與敵으로 相遇하야 未嘗一挫한이 韓久壯之曰如士玉者百人이면 吾無患矣라 丁未春에 鄭公이 召爲先導하야 與南錫仁으로 募衆於靑松할새 事發被執하야 中途脫還하다 及立巖之戰에 引一枝軍하고 乘夜襲敵하야 欲取全功타가 反爲所敗하야 鄭李諸公이 皆殉沒하고 自恨失機之罪萬死하야 收散軍歸東公하다 及東公이 身率諸軍에 世紀爲中軍將하야 多有捕獲이런이 東公이 又被害에 欲以兵으로 襲敵陣하야 脫大將出來하야 追至河陽要路라가 不得하고 逕于 八公山하야 竟不如意하고 後以偏軍으로 進陷長하야 殺數十敵하고 與鄭純基로 共推崔世翰爲首領하고 歲時에 設饌하야 進祭于鄭公父子及諸公하고 與衆誓死하다 世翰이 又敗에 不能獨支하고 被執於敵하야 士氣凜凜하야 罵敵不屈한이 敵酋曰爾以暴動之輩로 侵索於居民하니 非盜耶아 勵聲抗言曰汝以一種島夷로 恃海自强하야 扼我政柄하고 奪我疆土한이 古今未有之大賊也라 余則堂堂國士로 志在不失疆土하야 旣無轉饋之資하니 民是大韓民也라 食吾之食이어늘 敢言爲盜耶아 至達獄하니 獄司欲條服定刑이어늘 卽勵聲曰李世紀欲殺倭하고 倭欲殺世紀는 世所知也라 如何多言耶오 以所踞卓子로 引而投倒之하고 遂死於敵하다 其妹在數百里之外하야 自世紀被執以後로 日事往來探問이런이 方死之場에 卽護而歸하야 權于普賢洞後麓하다  <山南倡義誌 卷下 36~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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