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포켓(18)수강생들이 빠져나간 누드모델 수업시간은 항상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모델에 대한 배려다. 아무리 직업적으로 옷을 훌렁훌렁 벗는다고 해도 지키고 싶은 선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참관한 학생들과 사담은 일체금지 될 뿐 아니라, 목소리가 실린다면 뎃상, 정밀묘사, 스케치, 드로잉 수업은 꼬이기 일보직전이 된다. 그만큼 신비감을 간직하는 누드모델에게도 자세가 중요하다. 학생들도 벌거벗은 인간이기 전에, 작품을 완성할 대상으로 접근해야만 수준 높은 작품이 탄생한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서로 암묵적 약속이며 암묵적 예의일 것이다. 나는 커튼 뒤에서 쥐죽은 듯 납작 엎드려 있었다. 하물며 표현봉 조각가와 연관성이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커튼의 빈틈을 만들어 몰래 훔쳐본 죄책감은 있지만 인간 본연의 호기심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표현봉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일어난 것처럼 눈을 비비며 커튼 밖으로 나왔다. “이웃사촌이 큰 용기를 내었어. 몸매가 훌륭하다고 다들 난리야. 몸매뿐이겠나. 자세도 좋고 느낌도 좋고 무엇보다 그리기 좋은 얼굴선을 가지고 있다질 않나. 아무튼 칭찬일색이야. 어디서 소문 듣고 꼬드겨도 절대 흔들리면 안돼요.”아직도 열기가 남아 홍조를 띈 마담이 부끄럽게 입을 뗐다. “그럴 리가요. 호호. 무대에 한번 서는 것도 일생일대의 죽을 용기가 필요했어요.”마담의 호칭이 자연스럽게 바뀌어져 있었다. 강씨를 붙여 강이웃라고 불렀는데 표현봉은 누드를 보고 난 뒤 이웃사촌이라 했다. 강이웃에서 이웃사촌이 된 것은 한 단계 더 친숙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곱씹어 볼수록 그런 것도 같았다. 부르는 사람에 따라, 듣는 사람에 따라 수긍 평가지가 제각각이니까 말이다.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사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넘기고 있는데, 나만 마담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고 미끈한 다리만 생각났다. 다리위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시선이 고정되는 포인트에 너나없이 멈추게 된다. 낚시꾼이면 그곳에 자리를 펼칠 것이고, 농구선수는 그곳에 던져 넣을 것이고, 축구선수는 그곳에 뻥뻥 찰 것이다. 가슴과 허리를 이어주는 그곳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나는 커튼 뒤에서 내내 존재하지 않는 한사람이었고, 마담은 학생들을 상대로 누드모델에만 충실한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마담이 여자로 보일 때 털어놓고 싶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내심 행복했다. 표현봉과 마담이 음악다방으로 간 사이에 집기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괜히 신바람이 났다. 원통형 무대도 구석진 곳에 두려다가 문득 마담의 포즈가 생각나서 누드모델이 된 것처럼 요염하고 도도하게 눈도 아래로 깔아보았다. 무대는 그런 곳이었다. 넓은지 좁은지 상관없이 무대 위에 올라서면 시선이 주목을 받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분사해야 된다는 것을 동물적으로 알게 된다. 주눅 들거나 불안해하거나 당당하지 못한다면 이 시간을 망쳐버리기에 반드시 내 시간으로 붙들어 말뚝을 박아야 한다. 그것이 거침없는 세상이다. 이제껏 두문부출하며 안으로만 파고들려고 했던 은둔형 외톨이에, 6개월 이상 사회 미접촉에,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되어 대책 마련이 시급했던 내가 무대 위에 섰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족의 발전이고 사건이고 기적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세상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원통형 무대를 통해 그 깨달음의 무게는 만만하지 않았다. 구석진 제자리에 원통형 무대를 옮겨놓고 돌아설 때까지 온몸은 뜨거워져 있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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