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포켓(19)유난히 잦은 봄비가 작업실 창틀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오후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들었던 것도 같았다.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 조각상도 탁자에 올려두고, 조각칼도 작업하기 편하게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익숙한 정리정돈이 한없이 편하게 해주고 있다고 느껴졌다. 문득 빗소리 가득한 창문에 등받이 없는 동그라미 의자를 두고 다소곳 앉았다. 봄비는 겨우내 메말라있던 마음을 적셔주는 그리움 같았다. 억세지도 사납지도 않는 빗줄기 따라 먼 하늘에서 속살 하얀 빛이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신기해라. 신기하고 고마워라. 음악다방으로 간 표현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시간을 넘기도록 눌러 붙게 만드는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누드모델로 참여한 마담에게 충분히 빠질만한 매력을 인정하는 나로서는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마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작품의 열정이 솟아날 것 같았다. 하물며 이름난 늙은 조각가는 목마른 대지에 단비를 적시는 감성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껏 두 사람의 진행속도로 봐서 오늘이 그날일지 모른다. 음악다방 문이 안으로 잠겨있다면 짝짓기는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한다. 곧 멈출지 않을 촘촘한 봄비가 하늘에 빗금선을 채워가고 있었다. 전에처럼, 늦어지니 문단속하고 퇴근하라는 표현봉의 전화는 없었다. 그만큼 몰입의 시간은 길어지는 것 같았다. 한사람의 최선보다 두 사람의 최선이 힘을 모아 같은 목적지를 추구하고 있을 때, 결과치는 상당한 성과를 동반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확인하고 싶었다. 전화한통 없는 표현봉의 늦어짐을 상상 그 이상으로 끌어당기고 싶어 작업실의 문을 열고 아래층에 있는 음악다방 출입문 앞에 섰다. 나직이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열리면 안 된다는 소원을 담아 최소한의 힘을 실은 손목돌림이었다.예상대로 문은 잠겨있었다. ‘거봐라’하며 출입문에서 떨어졌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늙은 조각가의 꼿꼿하게 세운 남자가, 매력적인 여자의 속살로 파고들어가는 모습이 연상되어져 작업실 창가에 앉아 불끈거리는 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봄비는 마음을 읽었는지 오래 제 속을 채울 창틀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눈을 감고 맞춘 퍼즐들을 곱씹다가 눈을 떴을 때 순간 흠칫 놀랄 장면과 마주하게 되었다. 건너편 주택 옥상에서 언제부터인가 작업실 창문을 지켜보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평상시 같으면 옥상산책을 나왔거나 화단에 물을 주려고 나왔거나 했을 법한데, 이 빗줄기 속에서 우산도 없이 서있다는 것은 너무 낯선 풍경이었다. 처음에는 헛것을 보지 않았나 의심도 했지만 분명 사람이었고 여자였다. 시선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손을 흔들어 보았다. 저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빗줄기가 굵어질지 모르니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여전히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쳐다볼 뿐 오싹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창틀을 타고 들어오는 빗줄기를 무시하고 창문을 열었다. 작업실 안으로 빗방울이 튕겨져 들어왔다. 손나팔로 크게 모아 큰소리로 외쳤다. “들어가세요. 감기 걸려요!”내 목소리였지만 어찌나 크게 느껴졌는지 쩌렁쩌렁한 울림이 있었다. 그런 속에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건너편 옥상위에서 오소소 떨고 있다고 생각한 여자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빗줄기만 자우룩이 옥상 위를 유난히 빗금치고 있었다. 이럴 수가, 헛것이 보일정도로 피곤한 일상의 연속이었던가. 소름이 돋을 두려움으로 창문을 급히 닫았다. 더 이상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표현봉이었다. “백호군, 문단속 잘하고 퇴근하시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