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포켓(24)서화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더 많이 작아지고, 더 많이 우울해지고, 더 많이 으르렁 거렸을 게다. 부정할 수 없는 셈법이었다. 고마움의 연장선상에 한 눈을 팔지 않는 각오도 한 바구니에 담아두었다. 그래야만 고마움이, 푸르게 가지를 뻗고 잎을 매달 것이다. 꽃을 피우는 것은 변하지 않는 마음에서 차곡차곡 진행되다보면 자연스럽게 향기까지 찾아 올 것이다. 서화인의 집에서 아침을 맞았다. 요란한 햇살을 차단하는 커튼을 걷자 초여름이 성큼 다가왔다고 느껴졌다. 벗어둔 팬티로 눈부심을 물리치기위해 차양막을 하는 서화인의 즉흥적인 행동이 고맙고, 귀엽고, 예뻤다. “내 팬티인데 괜찮겠어요? 비위도 좋아.”“우리사이에 서로 팬티가 어디 있어요? 먼저 잡으면 주인이지.” “그런가. 당신은 그런대로 헐렁하게 입을 수 있지만, 난 꽉 끼기도 하고 꽉 눌리기도 하고, 번데기 저리가라가 되겠네요.”서화인은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다. “울 서방님, 출근하셔야죠. 달래가 듬뿍 들어간 된장국을 준비하겠나이다.”달래가 듬뿍 들어간 된장국을 곱빼기로 먹고 조금은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총선이 끝난 거리는 더욱 사람들로 부쩍 거렸다. 지지한 인물이 당선되었다면 그만큼 기쁨이 찾아왔을 게고, 재임기간 동안 엇박자를 낸다면 그만큼 울화통이 치밀 것이다. 문정부 때도 여소야대였고 윤정부 때도 여소야대가 된 셈이다. 정치권은 늘 시끄럽고 혼란스럽지만 그전에 맷집이 길러진 덕분에 차라리 민생을 돌볼 명분이 저마다 생긴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진단하면서 내심 뿌듯해졌다. 은둔형 외톨이이면서 6개월 이상 사회 미접촉으로 분류되었던 내가 어느새 사회의 구성원으로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작업실에 왔을 때 표현봉 조각가가 조금 들떠있었다. 직감적으로 음악다방 마담의 방문을 생각했다.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는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사회생활에서 얻은 요령이었다. “교수님, 제가 깜빡한 게 있습니다. 두 시간쯤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표현봉은 활짝 웃었다. “볼일이 있으면 당연히 자리를 비우는 게 맞지. 우리일은 워낙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라서 자칫 촛불처럼 꺼질 생명력이라면 작품의 완성도가 바닥을 치게 되지. 다녀오시게.”작업실의 문을 열며, 마담을 입구에서 마주쳤다. 채 닫지 않은 문 틈새로 비교적 크게 말했다. 마담도 표현봉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목청껏 외쳐주었다.“전 교수님께 허락받고 두 시간, 아니면 세 시간 있다가 올 겁니다. 두 분이서 즐거운 시간을 갖으십시오.”수줍은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의 얼굴이 마치 한 공간에 겹쳐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비교적 인파가 적은 한적한 인도를 따라 걸었다. 가로수가 푸른 잎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걸음의 보폭도 줄여가며 두 세 시간을 허비할 리듬을 타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놀이터에서 큰길 도로로 접어들었다. 서화인 남편이 문득 떠올랐다. 거짓말같이 고개를 돌렸을 때 모아비 4륜구동차가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그날 사고를 재현하기라도 할 것처럼 모아비는 인도로 바짝 붙어 달려갔다. 움찔할 정도의 거리간격으로 위협을 준 뒤, 멀어져가는 모하비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날 사고차량이다. 나는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