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5)지하실의 끝을 찾아 분명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확연하게 걸음을 옮긴 이렇다 할 느낌은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변화가 미미하고 발끝만 바닥에 닿는 아주 수상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스스로를 챙겨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동력이 그나마 생겨난다고 믿었다. 어디에서 날라져왔는지 모래가 신발바닥에 푸석거렸다. 그 자리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여태 다른 것에 가려서 관심을 끌지 못하는 뒤안길이 거기 있었다. 뒤안길은 걸어온 자국마다 더욱 길게 생기겠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어디에선가 날갯짓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한가득 들려왔다. 깡마른 여자는 머리끝이 쭈뻣쭈뻣 서는 두려움은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힘겹게 지하실을 찾아내기까지 공들인 수고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몇 발짝 앞도 식별할 수 없는 어둠속에서 깡마른 여자는 가슴을 오므리고, 이내 가슴을 펴면서 맹수의 포효를 터뜨렸다. 누구도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선전포고 같았다. 포효를 신호로, 지하실 밖을 동경하고 있던 수백 마리 비둘기들이 너나없이 날아올랐다. 왜 거기에 있었는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금할 사이도 없이 깡마른 여자에게 공격적인 날갯짓은 충분히 위협이 되었다. 얼굴을 감싸며 허리를 숙였다. 모래바람이 일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속에서 수백 마리 비둘기들이 앞 다투어 날아오르고, 어둠이 채 걷히지 않는 방향이었지만 제각각 본능에 가까운 날갯짓이 시작되고 있었다. 질식하도록 찬란한 행렬을 지켜보면서 깡마른 여자는 마른 침을 삼켰다. 수백의 날갯짓은 희망일까. 그렇다면 지하실 끝이 멀지 않았다고 받아들였다.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고 있을 때, 저쪽에서 한줄기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빛을 타고 먼지 입자들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비둘기들이 머문 자리를 벗어나기까지 지독한 노폐물냄새가 엉켰지만 속도를 더할수록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깡마른 여자는 이제 한줄기 빛이 이정표가 되었다. 걸음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듯 덜컹거렸지만 하루해가 지기 전까지 지하실을 벗어난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낙오된 몇 마리 비둘기는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다. 숨이 채가시지 않은 비둘기를 주워, 지하실 벽에 바짝 붙여놓았다. 지하실을 찾아오는 뒷사람들의 배려로 죽은 비둘기와 맞닥뜨렸을 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걷어내 주고 싶었다. 더디게 가는 시간이라 생각했던 속도가 왠지 뚜렷한 자신감으로 바뀌자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안으로 통하는 지하실 통로와, 지하실에서 바깥통로가 따로 만들어진 것으로 봐서 암울한 시기에 은신처 역할을 톡톡히 해온 느낌이 들었다. 이쯤이면 지하실을 벗어날 통로가 나와야 제격일 것이다. 벽 쪽으로 파이프관이 심어져 호흡곤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벌써 수백 미터를 걸어온 아득함은 숨길 수 없었다. 두 세 사람이 한꺼번에 굽히지 않고 걸어가도 될 널찍한 통로를 만든, 전 주인은 얼마나 불안한 일상을 경영했을까. 자신을 향해서 시시각각으로 죄여오는 형벌의 무게를 피하기 위해 지하실 만들기에 매달렸을 것이다. 좀 더 견고하고 안전하며 남들과 다른, 지하실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존감은 더한층 상승했을 것이다. 깡마른 여자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치 산책 나온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그리 멀지 않는 곳에 한줄기 빛으로 새여 들어오던 구멍이 보였다. 나무판자 문짝이 보였고 옹이가 빠져나간 구멍으로 빛은 비집고 들어온 셈이었다. 해의 각도에 따라 빛은 띠를 두르거나 입구에서 소멸되거나, 하루치 속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 온 것이다. 세월을 고스란히 삭혀낸 문짝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사고 없이 벗어났다는 안도와 문을 열었을 때 새롭게 마주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번갈아 다가왔다. 녹슨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