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영천역사박물관 ‘영일 정씨 전시회’ㅇ 조양각 옆 ‘읍성전시관’에서 공개ㅇ 살아있는 귀신 ‘증명서’ㅇ 살아있는 사람을 귀신으로 만드는 ‘면신례’ㅇ 영천에서 처음 나온 자료ㅇ 혹독한 신입관원 신고식 자료한자를 몰라도 어디 한번 해석을 보자. ‘新鬼祖碩鄭’ ‘신귀조석정’ 해석을 해 보려면 머뭇거리게 된다. 어디에서 끊어서 해석을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글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일지라고 해석해 내기가 어렵다. 쉬운 글자인데.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몇 자 되지 않는 이 글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거꾸로 한자씩 읽어보자 ‘新鬼祖碩鄭’ ← ‘정석조귀신’ 제대로 읽은 것이다. 조선시대 살아있는 정석조(鄭碩祖,1652~1689)를 귀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 사진1 설명 <정석조 면신첩>, 17세기, 종이에 묵서, 111.0×77.6cm, 영천역사박물관소장영천 임고면 선원리에 살던 정석조(鄭碩祖)가 1689년(숙종 15년)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를 받았을 때 받은 면신첩(免新帖)으로 추정된다. 이 면신첩은 영천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조선시대 관료 문화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살아있는 사람을 귀신이라고 부르면서 준 ‘면신첩’이다. 신입 관료에게 선배들이 주는 문서이다, 영천에서 ‘면신례’에 관련된 자료는 이번이 처음 발견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식 관원이 되기 전에 거쳐야 할 신고식 문화가 있는데 신참례(新參禮)이다. 정식관원이 되기 전에 일단 수습기간이 있어 임시직에 배속이 된다. 수습기간을 거쳐 처음 벼슬을 받는 신임 관원은 관례에 따라 술과 안주를 잔뜩 준비한 뒤 배속이 된 기관의 선배들에게 푸짐하게 대접해야 했다. 반드시 거쳐야 할 신고식이었다이때 신고식을 끝내고 선배들이 작성하여 주는 문서인 면신첩(免新帖)이다. 새로 들어온 신입을 놀리고 골탕 먹이기 위해서 이름을 거꾸로 쓰서 ‘정석조 귀신’이라 부르며 선배들이 주는 공식적인 문서이다.영일 정씨인 정석조(鄭碩祖)는 25세 되던 1676년(숙종 2년)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는 곧바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뒤 배경이 든든하면 모를까, 일정기간 수습기간을 거쳐야 했다. 문과급제자는 예문관(역사 담당기관)· 성균관(최고교육기관)·교서관(서적간행) 등에 배속됐다. 무과급제자는 훈련원(국방 담당) 등에 알단 배속됐다. 정석조는 1689년(숙종 15년)에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를 받았다. 아마 이때 허참 · 면신례 같은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그 신고식이라는 게 혹독했다. 선배들은 면신첩에 이렇게 적어서 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정석조 귀신에게.. 생각해보건대 너는 별 볼일 없는 재주를 가지고 외람되게도 높고 고귀한 벼슬자리[華秩]에 올랐다. 우선 청반(淸班-지위와 봉록은 높지 않으나 뒷날에 높이 될 자리)을 깨끗이 해야 하거늘, 너의 더러움을 받아들이고 허물을 감싸주는 것은 천지의 넓은 도량을 본받기 위함이며, 네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성현의 큰 도량을 본받기 위함이다. 그래도 흘러내려온 옛 풍속이라 지금 없앨 수는 없으므로 거위구이 담배 돼지고기 닭고기 안주를 즉시 올리도록 하라. 선배들이 쓴다. (수결 선배 2명)”이러한 면신례는 조선시대 그들만의 독특한 통과의례인 신고식 문화가 있다. 신참례(新參禮)는 권문귀족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리로 임용되면서 이들의 버릇을 고쳐 주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천재 다산 정약용(1762~1836년)도 자신의 ‘신입생 신고식’의 경험을 혀를 내두르며 생생하게 전한다.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를 줍는 시늉을 시키고, 수리부엉이 울음을 흉내 내라는 일 따위는 제게 시키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려고 애를 썼으나 어디 부엉이소리가 (양반 체면에)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고, 절름발이 걸음은 발에서 띄어지지 않는 걸 어쩌겠습니까.” 라고 편지를 적어서 보낸 글이 남아있다.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도 9번의 과거에서 9번 모두 장원급제를 함으로써,‘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별명을 얻은 천재이자 ‘성리학의 대가’로 불리던 천하의 이이도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결국 ‘면신례’ 자리에서 선배들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정하준 호구단자>, 조선1756년, 종이에 묵서, 66.6×76.0cm. 영천역사박물관소장▶선략장군행선전관(宣略將軍行宣傳官)정석조 –정중선 -정일진 – 정하준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부친이었던 정시교(鄭時僑)는 향년 31세 세상을 떠났으며. 정석조(鄭碩祖,1652~1689)는 1689년(숙종 15년)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를 받아 왕명(王命)으로 평안도에 봉수(烽燧)를 시찰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두진(痘疹, 천연두)에 걸려 향년 3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손자 학고(鶴皐) 정일진(鄭一鎭), 증손 교와(郊窩) 정하준(鄭夏浚) 등 명망 있는 선비를 배출했다. 정석조 면신첩(免新帖)은 영천역사박물관 읍성전시관(조양각 옆)에서 전시되고 있다. 문화 소재의 다양성 측면에서 흥미로운 자료로 17세기의 면신첩으로 전국에서 몇 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영천읍성전시관에는 100여점의 오천정씨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