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각 앞마당에 누워있는 글자가 없는 비석 사건 소송은 262년 전인 영조 17년 올라간다. 윤봉오(尹鳳五, 1688~1769)가 영천군수로 부임한 지 1년이 지난 때인 1741년에 시작된다.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에 수록된 1746년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교장(校長)으로 있었던 권광운(權光運) 등은 영천 조양각 앞마당에 자신의 선조인 영남좌도 의병장 권응수(權應銖, 1546~1608)의 영천수복비에 관련된 비를 세우려고 했다.그러자 辛酉(1741년)에 공조참판 창대 정대임(鄭大任, 1553~1594)의 5대 손으로 영천의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명고 정간(鄭幹, 1692~1757)이 소장(呈狀)을 영천군 관청에 있는 영천군수 윤봉오에게 권응수의 영천수복에 관련 비석을 세우는 부당함을 내게 된다. 이 고서 필사본은 영천역사박물관이 서울의 한 고서점으로부터 구입한 자료로 7월 중순에 입수되었다. 필사된 분량은 약 86장 172페이지 분량으로 목판본으로 바꾸어 보면 3책에 가까운 많은 분량이다.책의 장차(張次)인 차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수득기(隨得紀)로 ‘모은 여러가지 사적(事績)을 기록한 글’이다. 묵서 기록에 의하면 “後之覽者以此知事之曲直得失者焉略草隨得一卷冊子成篇 뒷날에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일의 바름과 옳음 그리고 얻음과 잃음을.... 간략하게 얻은 글들을 근거로 편차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다음 순은 치계 (馳啓)로 긴급하게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이다. 이 글은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으로 학봉선생 문집 권3에 실려 있는 치계진 주수성승첩장 (馳啓晉州守城勝捷狀)이다.이어서 일기(日記)로『충의공백운재실기』「永川復城記」를 수록하였다.이렇게 순서를 정한 이유는 진주수성승첩장(晉州守城勝捷狀)과 영천 복성기(永川復城記)에서 진주성은 성을 지키는 전투이고 영천성은 성을 빼앗는 전투로 서로가 확실히 다른 전투임을 확인하고 영천성이 가장 뛰어난 전성대첩(全城大捷)으로 성을 온전히 되찾은 전투임을 밝히고 있다.그 뒤에 진주성과 영천성을 비교하여 서로가 전혀 다른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기록이 유사함을 지적하여 비교한 글이 8장 16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다음은 권응수의『충의공백운재실기』수록된 복재 정담(鄭湛,1552~1634)의「永川復城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변(辨)을 자세히 구분하여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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