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호수정선생실기』중간본이 간행되는 시점인 1874년(고종11)에 중간 서문에는 환재 박규수가 1854년에 암행어사로 영천에 와서 조양각 앞 마당에 누워있는 글자 한자 없는 영천복성비의 모습이 잘 표현하고 있다. 호수실기 중간 서문을 살펴보면 “나는 예전(1854년)에 영남 암행어사가 되어 영천(永川)의 조양각(朝陽閣)을 지난 적이 있었다. 조양각의 뜨락 가장자리에 누운 비석이 있었는데, 갈아 놓은 지 오래되었으나 새겨진 글자가 없었다. 괴이한 생각이 들어 물어보니, 고을 사람이 말하였다.우리 고을이 만력 임진년에 왜적에게 함락되었을 적에 고을의 진사 정세아(鄭世雅)가 그의 아들 의번(宜藩)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신녕(新寧)의 무관 권응수(權應銖)도 마을의 용감한 장정들을 불러 모아, 드디어 정세아와 군사를 합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 고을을 회복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두 의사(義士)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그들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여러 차례 포상(褒賞)과 증직(贈職)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집안 자손들은 모든 공적을 자기 조상에게 돌리고자 다투어 송사(訟事)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비록 공적을 기록할 비석은 마련해 놓았지만, 끝내 공적의 글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나는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서문 기록에 의하면 1854년에 박규수가 암행차 영천에 이르러 “조양각의 뜨락 가장자리에 누운 비석이 있었는데, 갈아 놓은 지 오래되었으나 새겨진 글자가 없었다.”고 당시의 비신(碑身)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후손 정희규(鄭熙奎)가 조상의 호수실기(湖叟實紀)를 중간하려고 서문을 부탁할 때 박규수는 30년전 1854년 영천에 암행어사로 갔을때 조양각 앞마당에 글자없는 비신을 떠 올리면서 서문을 써 주었다. 1874년(고종11)에도 비석에는 글자 한자도 새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 원인을 환재 박규수는 “두 집안 자손들은 모든 공적을 자기 조상에게 돌리고자 다투어 송사(訟事)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비록 공적을 기록할 비석은 마련해 놓았지만, 끝내 공적의 글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이어서 글에서도 “정세아와 권응수 두 분은 관리로서의 의무가 있지도 않았고 평소에 양성한 군사가 있지도 않았는데, 광분한 적군이 날뛰던 때를 당해 창졸간에 의병을 규합하여 떨쳐 일어나 자신의 안위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분들이 어찌 공리(功利)를 다툴 뜻을 품었겠는가? 두 집안의 자손들이 제 조상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이처럼 비루하고 천박한 뜻으로 어찌 옛날에 조상들이 행한 사적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기록하고 있다.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자는 환경(桓卿ㆍ瓛卿), 호는 환재(瓛齋ㆍ桓齋)로,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철종 5년 갑인년(1854년) 박규수는 경상좌도암행어사로서 암행하고 11월 28일국왕께 보고한 기사가 승정원일기에 보이나 영천성수복비(永川城收復碑) 관련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5-09-01 22:38:30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이 사람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