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상 선생의 기록은 「산남창의지」와 「산남의진유사」의 차이가 극명한 부분이 더러 있다. 1946년 간행된 창의지는 ‘임중호는 관향과 살던 곳은 분명하지 않고 전말 또한 잘 모른다.’라는 한 줄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970년 간행된 유사에서는 ‘임중호’라고도 불리던 임용상의 활동을 지난 호까지 소개했던 것처럼 상세히 기록한다. 아래의 기록을 보면, 그는 산남의진이 해체된 후 일제 강점기 내내 광복운동에 전념했고 해방되던 해부터는 건국활동을 하다가 1958년 서거했다. 그리고 1964년에 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서 大邱三一同志會(대구삼일동지회)에 교섭하여 公(공)의 유해를 경북선열묘지에 이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산남의진을 연구할 때, 최초 기록인 1946년 창의지에 더 무게를 싣는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나 증보된 유사의 진실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가공된 가능성보다는 빠뜨린 부분을 증보한 것에 더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다. 산남의진 참진 의병의 숫자에 대해서도 1,000여 명에서 3,000여 명까지 주장이 자못 다르다. 임용상 선생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 중 하나는 정용기 대장 장례 직후 정환직 대장이 신병을 모집하고 임용상 좌포장에게 임시 훈련장으로 임명하고 북동대산에서 신병 훈련을 하게 했다. 그리고 다시 신병 200여 명을 모집하여 경주 주사산성에서 신병훈련을 명했다. ‘이번에 모집한 신병도 상당한 숫자로 되었으니~’ 라는 내용으로는 앞서 모집한 신병이 더 많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유격대장인 임용상 선생마저 ‘전말미상’으로 기록될 정도라면 창의지의 기록은 본부의 인물 중심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용기 정환직 부자 대장의 전몰 이후에 본진에서 벗어나 활약했던 유격부대의 인명은 거의 잊혀져버린 것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산남의진은 영천에서 창의되었으나 경북 전역에서 참진하고 활약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특히 그 활동무대가 포항과 청송이다 보니 포항은 3대 대장 최세윤 대장을 중심으로, 청송은 청송의병사의 편린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산남의진은 경북의 독립운동과 의병활동사에서조차 거의 말석이다. 언제쯤이면 경상북도 차원에서 산남의진을 재조명하고 선양하여 제 자리를 찾고 잊혀진 의사들의 넋을 기릴 수 있을까? 林龍相 義士 略歷(임용상의사 약력)⑥우리는 이 정보를 받고 徐鍾洛(서종락)부대는 주왕산으로 들어가고 南錫球(남석구)부대는 철영방면으로 돌아오고 林中虎(임중호)부대는 화산지방으로 몰려와서 六月(유월)에 의성방면으로 이동되어 의성에 주둔하는 왜병들과 자주 충돌하여 대구에서 응원으로 내려왔는 왜병수비대는 의성으로 집중되어 우리를 포위하는데 公(공)은 불행하게도 안평교전에서 權石出(권석출) 동지와 피금되었다 公(공)은 대구로 압송되었다 왜적들은 그해에 한일합병을 모책하는 中(중)이라 될수있는대로 민심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당분간 감형이 되는데 사형에 면하고 十年(십년)언도를 받고 복역하였다 左(좌)에 판결문 첨부判決書(판결서)慶尙北道 義城郡 安平面 槐山洞 居住 農業 林龍相 (中虎) 三十三年(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추산동 거주 농업 임병오 (중호) 삼십삼년)慶尙北道 尙州邱 內北面 冒山洞 居住 雜貸商 權石出 二十七年(경상북도 상주구 내북면 모산동 거주 잡대상 권석출 이십칠년)右 被告等에 對하여 左와 如히 判決함(우 피고등에 대하여 좌와 여히 판결함)主文(주문) 被告 林龍相을 懲役 十年에 處하고 同 權石出을 懲役 七年에 處함(피고 임용상을 징역 십년에 처하고 동 권석출을 징역 칠년에 처함)理由(이유) 理由文은 紙面 관계로 省略(이유문은 지면관계로 생략)明治 四十參年 七月 二十五日 大丘地方裁判所刑事部(명치 사십삼년 칠월 이십오일 대구지방재판소형사부)裁判長 判事 五味逸平  印 裁判長 判事 和田四郞  印 裁判長 判事 官沿梅吉 印(재판장 판사 오미일평  인 재판장 판사 화전사랑  인 재판장 판사 관연매길 인)公(공)은 庚戌年(경술년) 합방으로 因(인)하여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청송 의성 등지로 배회하면서 그날그날을 경과하니 도리어 처신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은지라 왜냐하면 제일 큰 문제는 생활경제에 해결을 못 보고 그 다음은 人口(인구)가 희소한 지방에 있으니 요 시찰인으로 찾기 쉬운 사람이 되어 왜정경찰관들이 항상 뒤를 따르게 되고 그뿐 아니라 옛날의 약속을 믿고 찾아오는 그 동지들도 이 협착한 지대를 밟는 것이 도리어 위험하게 되는 일이라 이렇게 될 바에야 人口(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 활동하는 것이 도리어 편리할 것 같더라 公(공)은 가족을 인솔하여 大邱(대구) 어느 곳에 정착하여 그날그날 생활을 계속하여 오면서 지하공작으로서 독림운동을 하는 그 동지들을 연락하게 된다 처음에 안일암 회의에 가담함을 시작하여 달성공원광복회에도 참석하였고 해외에서 입국하는 의열단원의 일에도 협조하였으며 군정서 연락으로 군자금 모집에도 활약하였다 辛酉年(신유년)에 들어와서 우리 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되어 왜적들이 국내 국외를 망라하고 검거에 대활약을 하는데 公(공)은 우리 독립운동자들을 은닉시켜준 사건에 발각되어 四年(사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고 출옥하다 그 뒤로부터 일동일정에 자유를 못하고 요 시찰인 감시 그물 속에 들어있었다 公(공)은 五十一(오십일)세 되는 丁卯年(정묘년)에 암중활동으로 만주에 건너가서 정의부에 가담하였다 군자금 모집을 약속하고 본국에 돌아와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에 세계 二次(이차)대전이 발발되어 왜적들의 검거선풍이 더욱 혹독하였다 그 때문에 운동을 활발하게 못하고 하회를 기다렸다 乙酉年(을유년)에 해방을 맞이하여 건국준비에 활동을 전개하더니 뜻밖에 三八(삼팔)선 문제가 있어 국토가 중단되고 민족이 결렬되어 우충좌돌하다가 결국에 六二五(육이오)동란이 일어나 동족상살을 무자비하게 하였다 이것이 모두 公(공)의 가슴에 병근으로 되어 오다가 戊戌年(무술년) 섣달그믐에 이르러 八十一(팔십일)세를 一期(일기)로 하고 한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다 붉은 깃발은 고향 땅 청송을 바라보고 가더니 甲辰年(갑진년)에 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서 大邱三一同志會(대구삼일동지회)에 교섭하여 公(공)의 유해를 경북선열묘지에 이장하고 묘비를 세우다 묘비문은 지면관계로 이기하기를 생략한다 그 뒤에 五年(오년)을 지나고 己酉年(기유년)에 이르러 中虎 林龍相義士(중호 임용상의사)의 傳記(전기)가 世間(세간)에 반포되다 편찬 범위는 지면관계로 소개함을 생략한다 그해 己酉年(기유년)에 大邱(대구) 남구 대명로타리에서 林龍相義士(임용상의사)를 위하여 기념사업회가 발기되어 사회 각계 각층에서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추진 중이다 사업회 구성체계는 지면관계로 소개함을 생략한다. <山南義陣遺史403~4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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