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접하는 무수한 사건·사고 속에 망각의 회전율은 날로 빨라집니다. 어제의 분노가 오늘의 새로운 이슈로 덮이고, 잊히는 일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참사나 비리의 가해자들에게 이런 망각의 메커니즘은 더없이 고마운 안식처일지도 모릅니다. 올공 시위와 청문회 등 세간의 관심사 속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부실 선거관리 역시 대중의 기억 저편으로 조금씩 밀려나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망각이 일상화된 사회라 할지라도, 이번 선관위 사태만큼은 결코 묵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선거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뿌리이자 유권자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신성한 통로입니다. 선거 관리 과정의 공정성과 정확성이 의심받는 순간, 선거의 결과 역시 정당성을 잃게 되며, 이는 곧 국가 통치 시스템 전체의 마비로 이어집니다. 정치권은 민감하게 반응하는 2030 청년 세대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지만, 이것이 특정 세대에 국한된 문제일 리 없습니다. 지금의 사태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모든 유권자, 그리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미래 세대 모두의 참정권이 직면한 엄중한 위기입니다. 거리에 나서지 않았다고 해서 유권자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 모두가 냉철하게 침묵하는 눈빛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이번 사태는 명백히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한 ‘행정 참사’입니다. 투표용지 부족과 같은 기본적인 물자관리 부실은 물론, 투표 결과가 전산에 잘못 입력된 정황은 민의가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준 치명적 결함입니다. 심지어 지난 총선의 전산 입력 착오까지 뒤늦게 드러나면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채 숨겨져 있던 부실 관리의 암수가 얼마나 더 존재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당선 결과에는 영향이 없었다”는 선관위의 비루한 해명은 전형적인 책임 회피에 불과합니다. 피해자가 죽지 않았다고 해서 폭행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결과가 바뀌지 않았다고 해서 민의의 신뢰를 짓밟은 행정적 무능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사실 위기의 징후는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경고음을 울렸습니다. 과거의 ‘소쿠리 투표’ 논란부터 고위 간부 자녀의 ‘특혜 채용’ 비리, 투표용지 무단 반출 사건에 이르기까지,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명분을 방패 삼아 성역에 안주해 온 선관위 내부의 도덕적 해이는 벌써 위험 수위를 넘어섰습니다. 매번 사태가 터질 때마다 선관위는 “통렬한 반성”과 “외부 통제 강화”라는 화려한 수사로 국민을 안심시켰습니다. 헌법 기관이라는 엄숙한 권위와 대법관 출신 위원장의 비장한 표정에 가려 의심은 매번 잠재워졌지만, 돌아서면 독립성을 이유로 외부 감사를 철저히 거부하고 조직의 폐쇄성을 한층 더 견고히 다졌던 것입니다.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다룬 드라마 <체르노빌>에서는 뼈아픈 경고가 나옵니다. “진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짓을 거듭한다. 그러다 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진실에 대한 빚이 쌓이고, 언젠가 그 빚은 청산되어야 한다.”이처럼 거짓으로 쌓인 빚은 결국 민주주의의 신뢰 파산이라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으로 되돌아왔습니다.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은 명확한 진단과 원인 규명에 있습니다. 선관위 개혁은 단순히 실무자를 형사 처벌하고 인적 쇄신을 감행하는 직관적인 분노 표출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처벌 위주의 접근은 조직원들을 방어적으로 만들고 사실을 더욱 깊이 숨기게 만듭니다. 곪아 터진 환부의 실체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내부 목소리입니다. 이제는 조직 내부의 구조적 결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외과 수술에 준하는 근본적인 제도적 수술을 단행해야 합니다. 민의를 온전히 담아내는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선관위는 더 이상 다음 선거를 관리할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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