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구리(30)보현산의 위용을 뽐내는 봉우리에, 되바라지게 홀로 핀 소나무 한그루는 바람결을 품고 있었다. 매서운 북풍이 수시로 다녀간 흔적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나뭇가지들을 결코 내치지 않았다. 어쩌면 곰내재를 거점으로 한, 우두머리 야생마가 뜨거운 열기를 주체하지 못해 이곳까지 올라와 비좁은 몸을 부비고 간 영역표시였을까. 소나무의 껍질은 한쪽으로 쓸려, 밀착하지 못한 둥치와 간격이 벌어졌지만 생명을 바투 거머쥐고 있는 데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소나무 한그루는 보현산 최고봉에서 내내 굽어보고 있었다. 혼탁한 계절은 시기나 흐름을 역행한 대가(代價)처럼 보였다. 척박한 땅에 싹틔울 드센 뿌리들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산은 그대로 존재했지만 무수한 생명들이 하늘을 향해 하찮지 않게 자라났다. 된서리를 맞은 밤이면 땅거죽이 얼어붙어 멀리서부터 서리가 쌓였다. 보현산 봉우리는 계절을 종잡을 수 없게 살얼음이 얼기도 하며, 새벽에는 짙은 안개가 자우룩하게 쌍수(雙手)를 들어 영접하게끔 했다. 그것은 일찍이 범의 땅으로 누런 갈색인 등을 봉우리의 바윗돌과 황토에 비유했다. 검은 가로무늬 등에, 흰색 배는 숲과 골짜기를 비유했다. 길고 검은 줄무늬 형태 꼬리는 어쩌다 만나는 둘레 길에 비유했다. 수풀이나 대숲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원귀 같은 목청은 혼자 다닐 수밖에 없는 고독한 한 생애를 비유했다. 바깥으로 뿜어대면서 열기를 삼키는 단풍잎이 비처럼 고집하던 하루 미시(未時)경, 보현산 주인인 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힘줄 고운 햇볕이 스스로 잦아지고 있었다. 조금은 불만 섞인 걸음걸이였다. 한걸음 한걸음에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거리는 뒤축의 무게는 쉽게 옮겨 다닐 수 없다는 시위 같았다.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 하는지 기어코 보여주고 싶다는 굳은 결기가 내비췄다. 범은 몇 번이나 보현산을 매개(媒介)로 해가 지고 뜨는 방향을 향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약초꾼도 나무꾼도 무겁고 수상한 기운에 뼈를 묻고 싶지 않다면 산을 비워줘야만 했다. 이미 독한 노린내에 승패가 결정되어 반드시 꼬리를 감추는 한쪽과, 고개를 빳빳하게 쳐드는 한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설사 오늘 꼬리를 감추는 한쪽이 되더라도, 내일을 도모하는 비장함으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약초꾼과 나무꾼의 든든한 한편은, 마을백성들과 함께할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범은 흔들거리지 않는 자신의 땅에서 이전의 땅을 돌려받고 싶어 했다. 멧돼지와 노루와 사슴과 산토끼가 뛰노는, 보현산을 온전하게 보장받고 싶었다. 그뿐.중턱에 자리한 보현사에서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풀잎들은 가을 안에서 스스로 눕기를 자청했다. 흔들거리거나 낚아채는 바람은 산허리로 둥글게 퍼져나가고, 잘그락 잘그락 거리는 풍경소리는 풀잎 안으로 파고들었다. 절간 텃밭에는 가을무가 흰 알몸으로 솟구치며, 승복을 벗어던진 중들은 배추 수확에 여념이 없었다. 왠지 범은 이곳만큼은 넘나보지 않았다. 자신의 땅 안에서 존재해야 할 신(神)의 땅이라 믿었는지 문턱에서 돌아서기 일쑤였다. 어느 먼 세월을 밟아 가다보면 중과 범이 만나는 교차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절간에 전수되는 무술을 익힌 중과 범의 피 튀기는 경합(競合)이 몇 차례 오고 갔을 때, 서로를 굴복시킬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어 승패와 상관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찢어져버렸다. 범은 보현사를 제외한 나머지를 자신의 땅이라 하고, 중은 보현사와 마을로 이어진 길을 자신의 땅이라고 한걸음씩 양보했다. 아무튼 범의 포효는 이틀을 내내 넓게 퍼져있는 숲과 빼곡하게 들어찬 생명들의 지반(地盤)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몇은 교미할 시기라 했고, 몇은 악에 받친 허기라 했다. 다만 마을백성들은 보현산을 범의 땅이라 깊숙이 인정하고 있었다.  -계속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6-08-23 17:48:35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초대석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