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역사박물관에 새로운 조선시대에 수수께기가 담긴 또 한 권의 책을 들어왔다. 이 책은  《포은선생속집圃隱先生續集》으로 1769년에 간행되어 임고서원에 보관되었던 장서(藏書)이다.  이 책은 숭양서원에서 1719년 정찬위(鄭纘輝)에 편차하고, 정관제(鄭觀濟)가 이후의 시문을 증보하고 이를 홍계희(洪啟禧)가 다시 편차하고 교정하여 판각한 개성 숭양서원판 ≪포은선생속록≫을 저본으로 간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포은선생속집은 1753년 士林 梅山 鄭重器 (1685 ~1757)와 鄭權(1692~1757)이 그 당시에 지역의 유림 사회와 임고서원이 화합하여 정찬위(鄭纘輝) 편차 본에 이후에 나온 시문을 편하고 등사하여 서원에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15년 뒤인 1769년 봄, 임고서원 원장을 비롯한 사림들의 의견을 모아 속집의 간행을 의논하여 판각한 본이다. 1768년(영조 44년) 영천의 오천정씨(烏川鄭氏, 영일정씨) 문중을 중심으로 간행된 《포은선생속집(圃隱先生續集)》이 오늘날 연세대학교 도서관(https://library.yonsei.ac.kr/)과 영천역사박물관 등 극소수 기관에만 판본이 남아있다. 당시에 영천군수 이상주(李商舟)는 목판 간행에 판목으로 쓸 판재를 제공하였고, 경상감사 이은(李溵)은 책을 만들 때 필요한 인출 책지 100속(束)을 보내주었다. 이렇게 간역을 계획하고 판각하여 1년 만인 1769년에 판각을 완료한 책이다.서지학(書誌學)으로나 조선 시대 출판 문화의 관점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이 책이 왜 이렇게 널리 유포되지 못한 이유가 있을까?조선 시대 개인 간행물로 불리우는 사찬(私撰) 문집의 특성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 판본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희귀해진 이유를 전문가적 관점으로 5가지로 분석해 보면① 첫 번째 문중 중심의 제한적 배포 (소량 인쇄)를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지방 문중이나 서원에서 간행한 문집은 관청(감영)에서 찍어내는 관판(官版)물과 달리 대량 유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인쇄 부수의 한계에 가장 큰 원인으로 종이(한지)와 먹의 조달 비용을 개인이나 문중에서 자체 부담했기 때문에, 초기 간행 시 대개 수십 부에서 많아야 100부 내외만 인쇄했을 가능성이다.또한 폐쇄적인 증정으로 간행된 책이 문중의 주요 인물, 편집에 참여한 지역 유림, 혹은 전국의 주요 서원에만 제한적으로 증정(贈呈)된 경우이다. 시장에 유통되는 상업 출판물이 아니었기에 초기 생산량 자체가 매우 적었으리라 예상해 볼 수 있다.② 두 번째로 정본(定本)의 등장과 속집의 흡수 (대체재의 존재)서지학적으로 특정 인물의 문집은 후대에 더 완벽한 형태의 ‘통합본(정본)’이 나오면 이전의 임시 판본이나 속집은 가치를 잃고 묻히는 경향이 강하다.《포은선생속집》의 경우, 1768년 영천 속집 간행 직후인 1769년(영조 45년) 개성 유수 원인손이 숭양서원에서 《포은선생문집》 정본(定本)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간(개성 기축본) 영향일 가능성이다.이후 1900년에도 이를 보완한 신본(新本)이 계속 나왔다. 후대 학자들과 문중에서는 전구(전체 구성)가 잘 갖추어진 최신 정본을 선호하게 되면서, 1768년의 《영천본 포은선생속집》 판본은 점차 이용되지 않고 사장되었을 가능성이다. (다음 호에 이어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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