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四聖諦)는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현실에서 생긴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며, 문제해결의 확신을 심어주고, 그 문제해결의 길을 제시하는 과정입니다. 문제해결의 길인 도성제(道聖諦)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여덟 가지가 제시되어 있고 이것을 팔정도(八正道)라 합니다. 실상을 바로 보는 견해[정견(正見)], 진리를 고찰하는 바른 사유[정사유(正思惟)], 도리에서 벗어나는 말을 삼가는 바른 말[정어(正語)], 잘못된 행동을 벗어나 생명을 살리고 자비를 베푸는 등의 바른 행위[정업(正業)], 정직한 생계 수단의 바른 생활[정명(正命)], 마음속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생겨난 선은 키워나가는 바른 노력[정정진(正精進)],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바른 마음챙김[정념(正念)],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바른 선정[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수행을 통하여 최상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권만식관향과 살던 곳은 분명하지 않고 평소 광산의 인부였다가 김경문을 좇아 산남의진으로 들어왔는데 그 전말(顚末)은 분명하지 않다.〈원문〉權萬植은 貫鄕及居所不詳이고 素以鑛山人夫로 從金景文入陣하고 顚末不詳이라 <山南倡義誌 卷下73p>權萬植 義士 略歷(권만식의사 약력)權萬植(권만식)은 貫鄕(관향)은 安東(안동)이라 본래 서울부대로서 입진하여 활약하더니 전말은 미상이라 <山南義陣遺史521p>전응팔관향은 용궁이며 의거(義擧)를 일으킨 처음 산남의진에 들어왔다. 일이 실패한 뒤 적에게 잡혀 감옥을 산 지 몇 년이 지나 출옥하였다.〈원문〉全應八은 龍宮人이라 起事之初에 入陣하고 事敗後에 被執而繫獄하야 數年而後出하다 <山南倡義誌 卷下73p>全相宅 義士 略歷(전상택의사 약력)全相宅(전상택)은 字(자)는 國三(국삼)이오 산남의진에 종군할 그때의 이름은 應八(응팔)이라 관향은 龍宮(용궁)이오 始祖(시조)는 竺山府院君(축산부원군) 諱元發(휘원발)이요 中世(중세)에 棗谷(조곡) 諱三益(휘삼익)의 十世孫(십세손)이라 高祖(고조)의 諱(휘)는 熙德(희덕)이오 字(자)는 順弼(순필)이며 號(호)는 竹軒(죽헌)이라 曾祖(증조)의 諱(휘)는 皓奎(호규)요 字(자)는 重建(중건)이며 祖(조)의 諱(휘)는 文龍(문룡)이오 字(자)는 亨叔(형숙)이며 考(고)의 諱(휘)는 祿永(녹영)이오 字(자)는 元吉(원길)이며 妣(비)는 氏(씨) 諱(휘) 의 따님이라 永川(영천)에 세거하였다 高宗(고종) 庚辰(경진) 三月一日(삼월일일) 榮川郡紫陽面龜尾里第(영천군자양면귀미리제)에서 公(공)이 출생하다 성품이 仁厚(인후)하고 기운이 건장하고 교류 간에 약속이 있을 때는 충신한 성격이 있고 호방한 기질이 있어서 공중을 위하여 운동하는 공익사업에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가정환경에 따라서 글을 많이 배우지 못하여도 삼강오륜에 학식은 있었다 산촌에서 생장한 소치로 산짐승을 잡는데 견학이 있어 매를 날려 꿩 잡는 사냥을 많이 했기 때문에 험한 지대에 걸음을 잘 걸었고 또는 총을 잘 쏘는 포수로 유명하였다 본래 천성이 남달라서 가정에서 효우를 주장하고 친척에 화목을 행세하였기에 인근 동리에 칭찬이 있었다 公(공)은 이 세상에 나기를 이 나라 말운에 태어났으니 나기 전부터 나라 운수는 벌써 불행하게 되어 公(공)의 나이 세 살 되던 해에 壬午(임오)군란이란 난리를 듣기로 시작하여 차츰 겪어오는 난리소동으로 甲申(갑신)정변 청일전쟁 乙未(을미)시변 노일전쟁 모든 파란이 가위 년부년 각기각색으로 일어나는 난리가 단순히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탈취코저 하는 공작에 관계된 것이라 우리 대한 신민으로서는 팔을 뽑아들고 이를 갈면서 왜놈들에 맺힌 원수를 분풀이하고자 하였다 公(공)의 연세가 二十六(이십육)세 되는 해 乙巳(을사) 冬(동)에 왜놈들이 우리나라 역적놈들을 더불고 강제로 오조약을 체결하니 이 나라에 모든 권리는 송두리째 왜놈들의 손에 들어가버렸고 이때에 산남의진이 일어나서 왜놈들과 싸웠다 公(공)은 이에 가담되어 몇 해 동안 여러 곳에서 적과 싸울 때에 위험을 피하지 않고 혈심성력을 다하였다 그러하다가 역대 대장이 모두 순절하고 국토는 전부 왜놈의 땅이 되고 의병이 종말될 때에 公(공)은 왜놈들에게 붙잡혀 종신징역을 받고 복역하다가 차츰 감형되어 칠년 만에 출옥되었다 그로 인하여 가정 생계는 말할 수 없이 궁박하게 되고 부모 처자 형제가 모두 유리생활을 하였다 公(공)은 이와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수십년간 광복운동에 이바지하다가 결국 八一五(팔일오) 해방을 목격하고 영일군 기계면 인비동에서 乙未(을미) 五月二十日(오월이십일)에 향년 七十六(칠십육)세를 일기로 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족으로 아들 炳一(병일)이 있었는데 생활난으로 十年(십년) 전에 행선이 불명되었고 손자 基亨(기형)이가 그의 모친 金氏(김씨)와 인비동에 있고 公(공)의 무덤도 인비동 뒷산에 있다 公(공)의 고향은 원래 영천군 자양면 삼귀동 상귀미란 곳이다 그 동리는 龍宮全氏(용궁전씨)가 수십호 단취로 전거한 문중인데 협우로 된 山村(산촌)이라 지대에 따라서 모두 형세가 청빈하여 여유있는 생활은 못하였다 그렇지만 문중 규모는 특별하다 公(공)이 의병진에 투신한 관계로 그 문중은 왜정에 압박을 더 혹심하게 받았고 公(공)의 가족이 유리할 때에도 다소간 원조하더니 도금하여 公(공)의 무덤이 타향에서 쓸쓸하게 있는 것을 문중이 걱정하여 의논을 정한 결과 매 호당 전곡을 연출하여 그 집합된 액수를 취리하여 그만 정도가 되면 공의 무덤을 고향 선영계하에 이장하고 묘에 비를 세울 준비를 하고 비문까지도 문중에서 준비하고 모든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다 <山南義陣遺史440~45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