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구리(31)보현산에 긴 겨울이 쪼개듯 덮쳐왔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이삭 줍는 아이들이 잠깐 보인다 싶더니 짧은 산 그림자는 어설프게 자취를 감췄다. 겨울 철새가 날아들었다. 기러기와 오리와 고니가 습지며 강어귀에서 목격되었다. 무심히 스쳤던 서산마루가 한순간에 냉기를 쏟아냈다. 다행히 겨우살이 준비를 마친 마을백성의 부뚜막엔 장작이 가득해서 순식간에 닥친 맵찬 바람에도 근심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궁색한 옷매무새를 뚫고 들어오는 기운찬 겨울의 기세에 속상할 뿐이었다. 곰내재는 처음부터 텅 빈 벌판인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곳곳을 채워주던 야생마들은 마을백성들이 파놓은 동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 때때로 모습만 비죽이 드러냈다. 동굴입구에 둔 건초더미로 활동량이 적은 위장을 채우고, 다시 동면이 아닌 동면생활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것이 겨울이 전해주는 매서움이었다. 어쩌면 사계절 중에 한 계절을 쉬어가라는 묵시(默示) 같았다. 겨울금슬(琴瑟)로 뱃속에 아이들이 잉태되었다. 일용할 양식을 아껴가며 화롯불 아래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폭이 좁은 강어귀에서부터 살얼음이 덮이고, 잎사귀를 떨군 나뭇가지들이 바람을 쟁여두지 못했다. 늦가을 내내 생기던 물안개 쪽으로 몰려가 두꺼운 얼음을 생성했다. 얼음 위에서 아기고라니가 미끄러졌다. 버틸 힘이 없었던지 일어서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강어귀에서 어미고라니가 섧게 울었다. 울음을 듣고 안간힘으로 기어서라도 오라는 응원 같았다. 도와줄 수도 없지만, 짱짱한 얼음이 주는 위험성은 이미 경험에서 터득되어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나오지 못하면 버려두고 갈지 모른다는 뼛속 추위에 노출되어 있었다. 두마폭포가 얼어붙었다. 어미고라니와 아기고라니의 절절한 울음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서산 노을이 보현산 아래로 떨어졌다. 아마 가까스로 만나 갈대숲 어디쯤 보금자리로 찾아들어 갔을, 고라니의 행방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보현산은 더 독한 눈송이를 하늘에서부터 흩날리고 있었다. 사방은 이미 백옥으로 변신했고, 생명이 있다면 한껏 몸을 낮추어 겨울을 향한 접대를 스스로 시작해야하는 다짐을 세워야 했다. 눈꽃을 피운 소나무들이 보현산을 떠받들고 있었다. 이번 눈송이는 더 굵고 탐스러웠다. 범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며 몸에 쌓인 눈송이를 털어내었다. 첫 번째 맞이한 혹독한 겨울을 반드시 이겨내야만 명실공히 보현산의 진짜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음 밑에도 물고기들은 헤엄을 쳤다. 그다지 많은 량(量)은 아니지만 먹이를 찾아다녔고, 포식자들의 눈을 피해 수초사이로 몸을 숨겼다. 하늘을 볼 수 없을 뿐, 얼음을 통한 맑지 않은 하늘이 보일 뿐, 여전히 생태계는 존속(存續)했다. 살고 싶으면 먹이사냥을 해야 했고, 몸을 숨겨 자리 보존을 하게끔 했다. 세상은 얼음에 뒤덮여 물속은 멈췄다고 생각하지만, 더욱 치열하게 자신의 생명을 향한 사투가 공공연하게 벌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생명은 하찮았고 순간순간 배를 채우는 먹거리의 소임을 다하면 그것으로 직분을 다했다고 믿었다. 발원할 물줄기가 삼천을 이루며 합류지점에 융숭한 평야를 선물한 두마국(斗麻國)은 분명 고립되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흥하고 망해도 무던하게 연명할 백성은 천오백을 간당간당 넘겼지만 저마다 자존감은 드세기가 그지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 너머 세상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눈은 억수같이 쌓이고 있었다. 바깥사랑채에서 속수무책으로 발목까지 잠긴 측간이 힘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눌러 붙은 세월이 얼마던가. 낡고 허물어진 한 쪽을 손보다 보면 다른 쪽에 균열이 드러났다. 측간은 생명을 다했다 싶을 때 누대에 걸친 영역 표시 탓인지 호락호락 꺾이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