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모신 절이 수많은 불자들의 복전(福田)이 된 이유는 부처님이 여러 생을 통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작복(作福)의 인연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를 『대지도론 본생담』에서 찾아 각색해 봅니다. 오랜 옛날 시비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항상 자비를 행하여 일체중생을 가엾이 여겼습니다. 어느 날 그 왕에게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 왕의 겨드랑이 밑으로 숨고 그 뒤를 쫓아 매 한 마리가 날아옵니다. 매는 왕에게 말합니다 ″비둘기는 나의 굶주림을 해결할 밥이니 주소서.″ 왕이 말합니다. ″나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고자 서원한 바, 나에게 의지한 비둘기를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노라.″ 매가 말합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면서 굶주려 죽을 나의 목숨은 왜 구제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왕은 다른 죽은 고기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는 자신은 갓 죽인 더운 고기만 먹는다고 답하지요. 왕은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매에게 주고 비둘기의 목숨과 바꾸고자 합니다. ″왕께서 싱싱한 고기를 주신 것은 고맙지만 무게도 비둘기만큼 주셔야 마땅합니다. 왕께서는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그러자 왕은 곧 저울을 가져오게 하여 달게 하는데, 양 허벅지, 두 종아리, 두 팔, 두 가슴, 목과 등의 살까지 베어 올려도 여전히 비둘기 무게보다 모자랍니다. ″한 생명은 누구에게나 고귀한 것, 돌아보니 나는 한량없는 세월에 수없이 많은 생사를 반복하면서 오로지 나 하나 살겠다고 모진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선행은 실천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선행을 실천해 나의 운명을 스스로 바꾸리라.” 왕이 스스로 저울판에 올라가자 균형이 맞았습니다. 매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보살행을 실천하는지 물었습니다. 왕은 불도(佛道)를 얻기 위함이며, 자신의 고통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서원하였습니다.정치훈자는 경팔이고 호는 남초이며 동엄공의 사촌동생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워 1906년 병오에 경주의 일1)로 서울에서 영남으로 내려왔지만 병으로 산남의진을 따르지 못하였다. 당내(堂內)2) 일족들을 데리고 난리를 피하고 여러 차례 소와 술 등 자신의 재물을 털어 의병들을 배불리 먹였다.〈원문〉鄭致壎은 字景八이요 號南樵라 東广公之從弟也라 性이 寬厚하다 丙午之年에 以慶州之事로 自京還下하야 以病으로 不得從陣하고 携堂內諸族而避亂하고 傾私財하야 累以牛酒로 犒軍하다. <山南倡義誌 卷下74p>鄭致壎 義士 略歷(정치훈의사 약력)鄭致壎(정치훈)은 字(자)는 景八(경팔)이요 號(호)는 南樵(남초)라 東广先生(동엄선생)의 從弟(종제)라 性稟(성품)이 寬厚(관후)하다 丙午年(병오년)에 경주사건을 서울에 연락하였고 大小家(대소가) 가족들을 피난시키면서 전 가산을 진중에 헌납하였다.<山南義陣遺史533p>정옥기자는 옥여이다. 동엄공의 둘째 아들이나 출계(出系)3)하여 치훈의 아들이 되었다. 천부의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급기야 산남의진이 의거하던 날에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사방의 외부 세력들을 정탐하다가 입암의 변고에 함께 죽지 못하였다. 뒤에 군감(軍監)의 임무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눈물이 베갯머리를 적셔 마르지 않았다. 영덕의 전투에서 화약을 구하는 일로 모든 의병들을 각 지역으로 파견하여 다시 관동에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아버지께서 형의 장례를 명하셨기 때문에 정신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형의 장례식을 준비하던 중 영덕의 변고를 듣고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영덕의 전투 현장으로 달려가려 하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억지로 말리기에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가 없어 병이 났다. 혼돈 가운데 영천에서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총살된 변고를 당했으니 사람들은 모두 이를 꺼내 말하기를 꺼렸다. 아버지인 동엄공의 시신을 넣은 관(棺)을 옮기던 날 거의 죽었다 살아나기를 세 번이나 거듭하였다. 그 후 형의 자식 네 명을 어루만지고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이 망가지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늙었다.〈원문〉鄭鋈基는 字玉汝오 東广公之二子也오 出系致壎之后也라 性이 仁厚하다 及在倡擧之日에 不避風雨하고 四邊偵察外勢타가 立巖之變에 不及同死하고 後侍大人公하야 以軍監之任으로 不離左右하고 枕涕不乾이런니 至盈德하야 以求火藥之事로 全軍을 派遣各地而復合於關東爲期하고 因此之暇하야 大人公이 命其兄之葬故로 蒼忙歸鄕하야 準備之中에 聞盈德之變하고 顚沛赴之하니 左右强力挽之 不得自由故로 發病昏頓之中에 永川當變은 人皆諱之런이 返櫬之日에 幾死復甦者再三矣라 撫養兄子四人하고 廢身終老하다 <山南倡義誌 卷下74~75p>鄭鋈基 義士 略歷(정옥기의사 약력)鄭鋈基(정옥기)는 字(자)는 玉汝(옥여)라 東广先生(동엄선생)의 二子(이자)로서 南樵公(남초공)에 出系(출계)하였다 性稟(성품)이 仁厚(인후)하였다 풍우를 피하지 않고 진중과 진후에 활약하여 정보연락과 물자수집을 하였다 軍器監(군기감)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의진이 전말되고 은신하여 侄兒(질아) 四兄弟(사형제)를 교양시켜서 父兄(부형)의 유고를 진수시키고 광복동지 우재룡(禹在龍) 등과 연락이 자주 있었고 乙酉(을유) 해방을 보고 丙戌(병술) 正月(정월) 十八日(십팔일)에 逝去(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533~5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