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는 신수근과 청원부부인 한 씨의 딸로 태어나 1499년(연산군 5년) 성종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혼인하였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의 친할아버지 신승선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사위이자 연산군의 장인이었으며 아버지 신수근은 좌의정에다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그는 친가, 외가를 통틀어 일가친척 모두가 왕실의 후손이거나 인척 관계를 맺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 여식이었으며, 본인 역시 진성대군과 혼인해 부부인이 되었으니 신씨 집안은 어마어마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러나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중종반정을 반대하다 반정파에 의하여 살해당하였기에 반정 공신들의 압력으로 7일 만에 폐위되었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친정이 화(禍)를 당하고 남편 중종과는 강제로 이혼을 당하는 등 중종반정의 최대 피해자로 전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경왕후 신씨가 남편이 왕으로 옹립되었으니 당연히 왕비로 책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7일의 왕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실제 역사와 맞지 않다. 상당수 역사가들은 “단경왕후는 단 하루도 왕비였던 적이 없으며 추존 왕비에 불과하다”라는 의견을 낸다. 실제로도 정식으로 왕비가 되려면 책봉식을 치러야 하는데,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당일 바로 남편과 강제 별거가 되었다. 7일이란 기간은 단경왕후가 왕비로 지낸 시간이 아니라, 중종이 아내를 내치지 않으려고 버틴 시간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후 반정파에 의해 궁에서 쫓겨난 뒤 왕후는 도성 서쪽 인왕산 근처에서 궁궐을 바라보며 중종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바위 위에 치마를 펼쳐 말리며 멀리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그 모습을 본 중종 또한 궁궐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때부터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고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왕비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복위 조짐이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친정에서 생활하다 중종이 죽은 지 13년 후 1557년(명종 12년)에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 뒤로는 계속 폐비 신씨로 불리다가 그가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난 영조 때에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그의 무덤 역시 온릉(溫陵)으로 승격되었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인 양주시 백석읍의 잴봉(520.8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온 지맥이 장흥면에서 일영봉(444m)을 일으켜 본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온릉은 여기서 계속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좌측면에 위치해 맥로를 타지 못하고 산자락 측면에 모셔져 있다. 그러다 보니 묘소 앞쪽의 공릉천에서 올라오는 수기를 품은 계곡풍의 피해가 예상된다. 수세는 묘소 좌측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묘소 앞으로 흐르는 공릉천에 합수를 하여 묘역을 완전히 감싸주지 못하고 묘소 앞 우측에서 뒤돌아 다시 남동쪽으로 흘러나가니 배역한 형상으로 생기를 가두어주지 못하고 있다. 단경왕후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부러움 없이 자라 왕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 채 한 많은 세월로 여생을 보냈고, 사후의 보금자리마저도 주변 사신사와 수세 등 명당 길지로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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